종종 내가 기억하는 엄마와 실제 엄마 사이의 갭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카라의 프리티걸을 따라 부르는 중학생 딸을 보고 “여자가 예쁘기만 해서 다 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해주던 깨어있는 여성이었는데. 지금의 엄마는 딸이 차별적인 가사에 대해 한마디 하면 ‘뭘 그런 걸 가지고 일일이 화 내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삶의 흔적은 많은 것들을 무디게 만든다.
엄마는 한때 대학원을 다니면서 집안 경제까지 책임졌는데, 아무리 바빠도 딸들이 먹을 요리를 해놓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바쁠 때 만들어 놓던 단골 메뉴는 큰 솥에 한소끔 끓인 닭곰탕이었다. 나는 엄마가 끓인 곰탕보다 닭곰탕을 더 좋아했는데, 엄마가 한 곰탕은 한우 잡뼈를 고아 평양냉면 마냥 맑고 고기가 적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피치 못할 사정 아니면 외식보다는 집밥을 챙기던 그녀는, 유기농 식료품 가게 한살림을 알게 된 이후 장을 거기서만 보기 시작했다. 고기보다는 유기농 야채 위주의 식단을 먹게 되었고 당시 나의 체지방률은 10%대를 기록했다.(물론 지금 체지방은 상당하다) 한창 단백질을 필요로 하는 성장기 청소년으로서 항상 배고팠던 기억이다. 하지만 또 착해서 (그리고 용돈도 적어서) 밖에서 뭘 사 먹지도 않고 집에서 주는 것만 먹었다.
그녀가 유기농에 빠졌던 초기에는 건강한 재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 되려 맛을 후퇴시키기도 했다. 표고를 너무 많이 넣은 토란국이 특히 그러했다.
기억을 곰곰이 되감아 보았더니 할머니들이 파는 채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내가 대여섯 살쯤 됐을 무렵, 팔을 쭉 뻗어 엄마 손을 잡고 시내를 걸어 다니면, 빨간 다라이에 못생긴 호박이나 과하게 큰 상추 따위를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자주 보였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가는 길일 때도 엄마는 꼭 멈춰서 가격을 물어보고 몇천원어치를 샀다. 피곤한 마음에 엄마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커서 알고 보니 함양에 살던 그녀의 할머니가 떠올라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얗게 센 쪽 찐 머리에 비녀를 꽂고 하얀 한복을 입고서 “맹희야~”하고 부르셨다던 엄마의 할머니.
경상도 출신인 명희는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목욕탕에 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옷가게 사장이기도 했던 그녀는 매장을 열기 전 새벽 시간을 활용해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연년생 딸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목욕탕을 찾곤 했다. 사람 대신 물소리만 차 있던, 습기로 따뜻하지만 동시에 을씨년스러웠던 여탕이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는 꼭 목욕탕 의자에 비누칠하고 빡빡 닦은 다음 나와 동생을 앉혔다. 나를 먼저 씻기고나서 동생을 씻겼는데, 동생이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리기 무료했던 나는 그만 물 온도계를 조금 돌려버렸다. 샘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빨간색 쪽으로 수도를 돌린 게 그렇게 큰 일인지 몰랐다. 뜨거운 물을 알아챈 엄마는 나를 혼냈다. 아찔한 질투의 추억이다.
소풍 가는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는 김밥을, 동생에게는 케첩 볶음밥을 만들어주었다. 소풍엔 도시락만큼이나 간식이 꽃이다. 엄마가 평소 몸에 좋지 않다고 안 사주던 과자를 먹을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마트에서 자신이 생각했을 때 맛있는 과자와 음료수를 사와 버렸다. 예를 들어 빠다 코코넛 같은 과자를… 어느 방면에서 엄마는 매우 섬세했고 동시에 무뎠다.
독립해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엄마를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조미료는 쓰지 않고 맛은 다소 떨어지지만 건강하게 요리한다든가, 외식하면서 이 메뉴를 집에서 하면 단가가 얼마 정도 들지 계산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어릴 땐 엄마를 가장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와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그걸 답습하고 있는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