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지하철에서
회사 가는 길이 익숙해지기까지는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성수동에 살 적엔 도보 10분 거리 영동대교 정류장에서 4212번 버스만 타면 바로 회사에 도착했다. 버스 배차 간격이 짧아 아홉 시 사십 분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면 열 시 출근이 가능한 최적의 입지였다.
봉천동으로 이사하고 나서부터는 방이 하나 더 생긴 대신 출퇴근길이 복잡해졌다. 마을버스를 타고 숭실대입구역에 내린 다음, 고속버스터미널역까지 가서 3호선으로 환승한다. 그리고 신사역에서 하차한다. 5분을 걸어야 회사가 나온다. 지하철은 특유의 복잡성을 가졌다. ‘몇 번 플랫폼에서 탑승하느냐’가 ‘얼마나 빨리 역을 빠져나갈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즉, 머리를 써야 하는 교통수단이다.
이사하고 일주일 동안은 누가 보면 외국인 여행객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핸드폰을 꽉 쥔 채 두리번거렸다. 분명 지하철 앱을 보고 있었는데도 반대 방향 열차를 타거나 내려야 할 정거장 지나치는 실수를 범했다. 회사에 늦는 것은 상관없는데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면 잔뜩 성이 났다.
하지만 다행히 낯섦은 금방 사라졌다. 두 달 만에 플랫폼 번호를 보지 않아도 동물적 감각으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이득인 번호 앞에 서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 전광판을 보지 않고도 내려야 할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흰자로 슬쩍 본 전광판에 글자 수가 많길래 망설임 없이 내렸다. 내방 - 남성 - 이수 - 숭실대입구. 내가 내릴 역은 글자 수가 배로 많다.
인천에서 강남을 거쳐 경기 북부까지 잇는 7호선 장암행.
서울 남북을 효율적으로 왕복하는 황금 노선 3호선 대화행.
내가 타는 열차는 늘 붐비기에 감히 앉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서서 가지만 그럼에도 1호선을 타고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던 시절만큼 인성이 썩어 들어가진 않는다. 이십 분만 견디면 탈출할 수 있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애매한 야근을 하고 8시 반쯤 퇴근했다. 이게 웬일. 지하철에 빈자리가 듬성듬성 있었다. 비록 두 정거장 밖에 가지 않지만 롱패딩으로 빵빵해진 엉덩이를 들이밀어 자리에 앉았다. 이거지. 행복감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앉는다고 별다른 걸 하진 않는다. 새끼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받친 채 회사에 틀어박혀 있느라 체크하지 못했던 전 세계 최신 이슈를 살폈다. 의자 아래에서 나오는 히터 바람과 아주 약간 푹신한 의자로 쉬이 노곤해졌다.
그런데 그만
내릴 역을 놓쳐 버렸다.
아아. 자리를 차지한 기쁨에 심취한 나머지 고속버스터미널을 지나 교대역까지 와버린 것이다. 무거운 엉덩이를 얼른 들어 올린 나는 2호선으로 환승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집에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교대역 플랫폼엔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인간들이 넘실댔다. 교대역에서 방금 끝난 야구 경기나 아이돌 콘서트, 하다못해 애니메이션 상영회라도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평소 2호선으로 통근하는 현에게 ‘교대는 원래 이 지랄이냐’고 물었고, 현은 ‘응 원래 그 지랄’이라고 답했다.
교대역에서는 콩나물시루가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철 하나를 보낸 다음에야 겨우 탈 수 있었다. 열차 안에 갇힌 나는 앞사람 패딩 모자에 파묻힌 채로 생각했다. 3호선에서 앉은 일은 사실 행운이 아니었다고. 서 있었으면 다리가 아파서 계속 언제 내리는지 체크했을 것이고 그럼 얌전히 올바른 환승을 했을 것이다.
약간의 불편함은 몸을 긴장하게 만들고 해야 할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 어쩌면 지하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편하다는 이유로 한 직장에만 머무른다면, 끊어내야 할 인연을 버리지 못한다면, 내가 본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순환 열차처럼 한 군데만 빙빙 돌게 될지도 모른다. 자고로 인생에서는 적절한 하차가 중요하다. 내리겠다는 결심과 문을 나서는 용기.
라고 여전히 앞사람 패딩 모자에 파묻힌 콩나물시루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깨달음도 주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떠올렸다. 졸려 죽겠는 와중에 손잡이를 붙잡고 휘청거릴 때, 멍하니 지하철의 창문 속 어두운 터널을 바라볼 때, 무채색 사람들 틈에서 마치 모모 속 회색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 그럴 때마다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오곤 했다.
그러니까,
몸도 마음도 힘들 때면
‘이 불편함이 나를 올바른 곳으로 데려가는 중이다’라고
한 번쯤 생각해 보길 바라며,
길게 적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