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회사를 다닌 지 어느새 햇수로 5년째다. 매일 같이 사무실에 앉아 표지만 다른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본디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연차다.
나이가 들수록 ‘뭐든 될 수 있다’거나, ‘뭐든 할 수 있다’ 따위의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죽기 전 외국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던 지난날의 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일이 적어지는 까닭에 대해 혹자는 잃을 게 많아져서 그런 거라 말한다.
나는 가질 수 있는 게 적어져서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서울의 아파트도, 외국인 베스트 프렌드도, 로또 당첨의 기회도, 갑작스런 길거리캐스팅도 포기한 지 오래다. 내가 손을 뻗어 가질 수 있는 수준만 쥐고 살게 된다.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이찬혁의 청룡영화제 축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신곡 파노라마를 부르며 파격적인 장례식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 화제였는데, 나는 노래 보다도 젊음과 성공만 스포트라이트 하던 연말 시상식에서 죽음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나도 모르게 파노라마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지~”
보고서용 피피티를 만드느라 뻑뻑하고 벌게진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한 소절만 반복해서 불렀다.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발음했다. 어쩌면 그 개념 자체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회사 관두고 확 이집트로 떠나버릴까. 남미가 그렇게 좋다던데, 페루나 멕시코도 가보고 싶다. 아니면 인도. 바라나시는 꼭 가봐야지. 아니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시골 내려가서 글 쓰면서 로컬 크리에이터로 살아볼까. 아냐 그 전에 호주 워홀을 가보자 … ‘
신년마다 반복되는 별 의미 없이 요동치는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막연한 꿈들이 물먹은 씨앗처럼 살아났다.
꿈 속을 헤매고 있는데 간만에 동생 금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의 십년지기 친구 위가 취업 준비 중인데, 내가 5년째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하다며 언제 한 번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는 호주 워홀을 다녀온 남자 사장이 운영하는 브런치 가게에서 만났다. 위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관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도움 될만한 말을 해주진 못했다. 팀에서는 아직 막내인데, 98년생 금과 위 앞에서는 관록 있는 베테랑 직장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회사원 언니가 대단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내가 한 거라곤 회사 오래 다닌 것밖에 없는데 동생의 자랑이 되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가볍게 생각했던 퇴사에 무게가 실린다.
아마 1월 말에 들어올 소정의 성과금과 4월에 시행될 연봉 협상이 또다시 무게를 더할 것이다.
점점 무거워져 나는 그만 이곳에 고여 버리겠지.
가끔 직장 생활이 소꿉놀이 같을 때가 있다. 무료하고 긴 인생을 견디지 못한 인간들이 ‘너는 대리 역할’, ‘너는 팀장 역할’로 나누고 역할 놀이하는 것 같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자 가짜 배역에 집중하는 것 아닌지.
인생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매일 오간다.
그저 둥둥 표류한다.
(2025年 3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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