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얼굴
카를로와 삼겹살을 먹으러 갔던 어느 금요일이었다. 우리는 뚝도 시장 근처에 곧 무너질 것 같이 생긴 식당으로 향했다. 뿌연 창문 사이로 늘 술 취한 아저씨들의 왁자지껄함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맛집일 거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날도 술 취한 중장년 남성 무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삼겹살 2인분을 주문했는데 아쉽게도 적당한 가격과 평범한 맛을 가졌을 뿐 맛집은 아니었다. 삼겹살을 질겅질겅 씹는데 자꾸만 옆자리 이야기에 귀가 쏠렸다. 썰렁한 가게에는 텔레비전도 노랫소리도 없었기에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들은 오랜 동네 친구인 듯했다. 서로 구김 없이 친해 보였다. 그런데 대화 내용이 내 또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놀랐다.
‘야 이 새끼 또 술부심 부린다
‘이따 노래방이나 가자 이번 주 겁나 힘들었다
‘돈 없어 무슨 노래방이야 집에나 가’
‘이거 네가 사냐?’
삶의 흔적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서 유치한 말장난을 하는 아저씨들을 나도 모르게 훈훈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카를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얼른 너도 훈훈한 눈빛을 쏴줘’라고 비언어적 표현을 했고, 카를로는 반찬으로 나온 미역국을 한 숟갈 떠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 어른들은 애들이랑 있을 때만 어른이 돼. 어른끼리 있을 때는 그냥 애랑 똑같애”
하긴, 저 아저씨들 자식들은 자기 아빠의 저런 유치한 면을 모를 수 있겠다. 나도 전혀 보지 못했으니까.
나의 아빠 덕은 딸들 앞에서 저런 유치한 모습을 보인 적 없다. 내가 본 덕은 무척 엄한 사람이었다. 언제 화를 터트릴지 모르는 사람. 그는 특히 밥상머리에서 엄격했는데 밥 먹다가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내가 열두 살이던 여름날, 나무 위에 유리를 올려 만든 식탁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식탁 왼편에 놓인 동그란 어항 속 산소 발생기의 뽀글뽀글 소리만 날 정도로 정적이었다. 그때부터 밥을 맛있게 먹을 줄 알았던 어린 나는 김치찌개 속 뭉근한 김치와 비계 섞인 고기의 조합에 심취한 나머지, 그만 고기만 건져 먹는 파렴치한 짓을 해버렸고, 벼락처럼 날아온 아빠의 호통에 맞았다. 나의 눈물로 식사는 곧바로 종료되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무렵 엄마는 아빠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나를 일으켰고, 벌건 눈으로 눈물의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막상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빠가 화날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
또 어느 날은 나의 엉성한 젓가락질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엑스자 젓가락질이 정석 젓가락질로 변할 때까지 눈치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는 아빠는 젓가락질을 잘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그의 젓가락질을 유심히 본 적도 없다(!)) 그 덕에 미끄러운 산낙지도 손쉽게 집어 먹을 만큼 뛰어난 젓가락 실력 보유자가 되긴 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을 때마다 아빠 눈치를 살피던 살 떨리는 기분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그는 남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동생이 먹던 냉면에서 풍뎅이가 나왔는데 사장이 사과만 하고 제값을 받자, 이렇게 장사하면 안 된다고 호통을 쳤다. 든든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 화가 나에게 꽂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덕은 한 마디로 아주 매서운 사람이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아빠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는 식당 직원에게 어떤 메뉴가 더 맛있냐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본인도 사실 다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고 답했고, 그는 능청스럽게 ‘그럼 같이 드셔야겠네’하고 촤하하 너스레 떠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에스트로젠 분비가 촉진되면서 묵직했던 존재감을 내려놓고 가벼워진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살가워져야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생존형 살가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그의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무척이나 달랐다.
‘형은 맨날 어리버리해서 별명이 어리버리였어요’
모자를 눌러쓴 극단 후배가 그의 엉뚱함만 생각하면 웃겨서 눈물이 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맨날 외로워 보였는데 알고 보니 좋은 친구도 많았다. (주로 술친구였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친구가 많을 나이라는 이십 대 중반인 나보다도 친구가 훨씬 많았다. 당장 내 장례식이 열린다고 가정했을 때보다 정확히 열다섯 배 많은 이들이 방문해 눈물을 흘렸다. 무거운 사람이라 여겼던 그는 가족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어리버리한 면을 목도하지 못했다. 그저 구설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처럼 그런 면이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평생 봐왔던 모습과 너무 달라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좋은 친구였으면서, 왜 정작 딸에겐 그런 모습을보이지 않은 걸까. 이제 덕의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다. 내가 아는 면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해볼 뿐이다. 그의 정반대 모습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나라고 다를까. 나 또한 관계에서 필요한 모습만 선택적으로 드러내며 인연을 유지해 나간다.
적어도 사람에 있어서는 단정짓지 않기로 했다. 스물네시간 함께 하는 나 자신도 모르는데 내가 누굴 알겠는가.
(2025年 3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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