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각자 '첫 제모의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요즘 알파세대들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레이저 영구 제모를 시작하던데, 나 때는 그런 거 없었다. 내 동년배들은 보통 일회용 면도기, 운이 좋다면 여성용 고급 면도기로 셀프 제모를 시작했다.
나는 털이 많은 편이다. 다리털 팔털 눈썹털 머리털 모두 많다. 정확히 중학생 때부터 털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달리 덥수룩한 내 팔털은 여성스럽지 못했다. 엄마에게 '내 팔털이 징그럽다'고 말하자, 엄마는 믿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왜, 보송보송 귀엽기만 한데."
중2병이 한참이었던 그때의 나는 엄마의 착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부숭하게 난 팔털이 귀엽다니. 딸이라고 거짓말을 치시는군.'
딸의 팔털이 귀엽다는 엄마의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집에 있던 일회용 면도기로 팔털을 밀었다. 좋은 건 하루 이틀이었다. 삼 일 차부터는 팔털이 다시 자라나느라 빳빳해져 따끔따끔했다. 아아, 팔털 제모는 최소 3일에 한 번씩은 면도기로 밀어야 지속 가능한 행위였던 것이다. 한번 이 끔찍한 굴레를 경험한 뒤부터는 주욱 팔털을 길러왔다. 자주 봐서 그런가, 요새 가끔은 엄마의 말처럼 나의 팔털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다리털과는 낯을 가리고 있다. 다리털 제모에서는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이다. '남성들은 시꺼먼 털 드러내면서 잘만 다니는데, 나라고 못할 것 뭐 있냐!' 싶다가도, 털을 부끄러워하던 중2병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나도 이런 나약한 스스로가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
얼마 전, 다리털의 '기능적 필요성'을 느꼈다. 여름 휴가 때 다리털을 밀고 바다수영을 즐겼는데, 발목과 종아리 뒤쪽에 햇빛 알레르기가 잔뜩 오른 것이다. 겨우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의 피부를 지켜 주었던 다리털이 자외선을 가려주지 못해 생긴 불상사였다.
언젠가 다리털과 친해지고 말아야지. 터럭이 내 피부를 지켜줄 수 있게, 터럭이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야지. 이번 여름엔 도전해 봐야지. 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