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
내가 회사에 다니는 가장 큰 이유가 밥벌이이라면, 그다음은 건강검진이다. 회사는 일 년에 한 번 수십만 원짜리 건강검진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건강을 맹신했던 아빠를 닮은 나는, 아마 회사원이 아니었다면 10년에 한 번쯤 검진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건강을 확인시켜주는 건강검진은 크나큰 복지가 아닐 수 없다.
입사 첫해부터 매년 똑같은 소견을 받았다. 바로 유방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 아직 젊어서 물혹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에 하나 악성일 수도 있으니 따로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라는 권고였다. 나는 그 말을 늘 흘려들었다. 언젠가는 가야지하면서.
올해는 달랐다. 왠지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울에 성형외과는 넘쳐나는데 유방 전문 병원은 드물었다. 유방을 다루는 전문 병원을 ‘유외과’라고 부른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는데, 여성 의사를 찾다 보니 선택지는 더 좁아졌다. 여성의 수만큼 수요가 있을 텐데 이렇게 병원이 적다니. 순간 유외과는 돈을 쓸어 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예약했다. 회사 근처 신사동에 1년 치 예약이 꽉 차 있다는 유명 유외과에 운 좋게 빈자리가 하나 났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수술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집 근처가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오전에 반차를 내고 유외과로 향했다. 원래라면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 거리였지만, 긴장을 한 탓인지 정류장을 지나쳐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야 도착했다. 정신없이 버스를 옮겨 타는 내내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종양이면 좋겠다. 암이어도 좋겠다. 회사 그만두게…’
암이 얼마나 비참한 병인 줄 알면서도 철없는 소망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가슴은 쥐어짜졌다가 뭉개졌다가 짓이겨졌다. 왼쪽 가슴에 의심스러운 혹이 하나 있어 10만 원짜리 정밀 촬영을 추가로 진행했다. 물리적인 아픔이 가득했던 촬영을 마치고, 상담을 받기 위해 진료실로 향했다.
의사가 상담을 해주는데, 화면에 내 가슴 속 혹 사진이 떴길래 폰으로 한 장 찍었다. 의사는 하던 말을 멈추고 “이거 찍으시면 안돼요”라며 곧장 제지했다. 그녀가 입은 흰 가운이 내뿜는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왜냐고 묻지도 않고 삭제하는 시늉을 취했는데, 그는 다른 환자의 정보가 들어있을 수 있어서 삭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복구해 샅샅이 살펴보았는데 내 생년월일밖에는 떠 있지 않았다.
결과는 다행히 추적 검사 요망이었다. 지난 검진보다 크기가 커지지 않았으니 더 지켜보자는 소견이었다. 월급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여유 있는 체크카드로 총 15만 7천 원을 결제했다. 실비 보험에서 조금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싶어 각종 서류도 받아냈다. 병가를 기대한 것이 무색하도록 별 소득 없이 회사에 돌아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건강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혹이 악성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질병의 초입에서 나의 본색을 보았다. 죽을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 거라는 정체 모를 강박. 10만 원을 지불했지만 의사가 맘대로 지워버린 나의 초음파 사진처럼.
내 삶도 내가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한 장의 사진과 같았다.
(2025年 9月 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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