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영아트 문방구에서 들었던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보다 한두 살 많은 통통한 소년은, 그즈음 우리 동네를 강타했던 룰라끈 매듭을 하나 집으며 말했다.
“시간 죽이는데 이만한 게 없더라”
마찬가지로 룰라끈을 사러 왔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전까지 내 사전에는 시간을 죽인다는 것, 그러니까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내가 룰라끈 매듭을 지으며 했던 생각은 그저 “재밌다” “예쁘다” 정도였다. 괜히 룰라끈 매듭을 지었다간 나도 시간 죽이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아 황급히 문방구를 빠져나왔다.
처음 어떤 세계를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엄청나다. 지금 나는 시간 죽이기의 고수가 되었지만 그때의 놀람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구마 사건도 기억난다. 이건 더 어릴 때로 시간을 돌려야 한다. 유치원생이던 나는 선생님이 껍질이 덜 까진 고구마를 간식으로 주자 단호히 거부했다.
“고구마 껍질은 먹으면 안 돼요”
늘 엄마가 껍질을 벗겨준 반질반질한 고구마만 먹었던 탓에 껍질은 먹으면 죽는 줄로만 알았다. 선생님은 껍질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나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다. 정말 고구마 껍질 먹어도 되는 게 맞냐고.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맞아 껍질째 먹어도 돼”
어제는 가족들과 절에서 주최한 연탄 봉사를 다녀왔다. 처음 들어본 연탄은 무겁고 단단했다. 가볍고 부스러질 것 같다는 인상과는 정반대였다. 3.6킬로그램의 연탄을 수백 번 옮기다 보니 평소 말썽인 오른쪽 손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고 연탄만큼 단단하고 진한 마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봉사를 마치고 까맣게 된 앞치마와 장갑을 벗은 뒤, 공양으로 나온 두부 카레를 먹었다. 다 먹은 그릇에 물을 넣고 단무지로 그릇을 구석구석 씻어 식사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스님과 차담 시간이 주어졌다. 질문할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영화 작가인데 올해 한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 또한 애니어그램 3번 유형답게,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내가 의미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인간이다. 연말만 되면 “올해도 해낸 게 없구나. 또 일 년을 허비했구나”하며 자신을 구박하는 방법밖에는 알지 못한다.
스님은 잠시 웃으시더니 이렇게 답했다.
“오늘도 살아냈구나.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세요”
삶에 기준을 너무 높이 잡지 말라며. 위험과 슬픔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이미 대견하다고.
일요일인 오늘, 이 말을 여러 번 떠올렸다. 계획했던 글을 쓰지 못한 주제에 책도 읽지 않은 나자신이 미워지는 순간마다, ‘그래도 오늘을 살아냈잖아’하고 스스로를 붙잡았다.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개념은 아직 너무나 어색하지만, 어느새 시간을 죽이기도 하고 고구마를 껍질째 먹기도 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나의 매일이 되길 기대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조금씩 금이 간다. 데미안의 것만큼 두껍진 않은, 한 에그몽 정도 되는 얇은 껍질을 벗는다. 깨질 때마다 모양이 조금씩 달라질 뿐, 절대 부서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