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잔잔한 인생을 살다 보니 BPM을 높여주는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나다움과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밝히는 요즘 여자 아이돌들의 노래는 신보가 나올 때마다 찾아 듣는 편이다
음악 연구가 아제이 칼리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서른세 살부터 새로운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 첫째 최신 음악을 유치한 노래라고 치부해 버리고, 둘째 어릴 때 듣던 노래를 다시 찾는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트리플에스 노래를 들으며 출근하고 있던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님에 안도했다. 하지만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떠올려 보고는 이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부 2009년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했던 2009년은 나에게 혁명적인 해로 기억된다. 우정밖에 없던 어린이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이 되었고, 학교 문방구 집만 오가던 생활 반경이 시내까지 넓어지는 진화를 이루었다.
열네 살짜리가 시내에 가서 할 수 있는 건 뻔할 뻔 자다. 만 원짜리 청바지나 가디건 같은 얄궂지 보세 옷을 사고 노래방에 가는 일이다. 명절날 집안 어른들과 가끔 가던 노래방을 친구들과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은 가히 혁명이었다.
키가 클 것을 대비해 한 사이즈씩 크게 산 교복을 입은 네 명의 패거리는 시내로 가는 2번 버스 맨 뒷자리에 쪼르르 앉았다. 같이 다녔던 친구의 이름은 기억 나지 않는다. 그저 같은 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친해질 수 있었던 시절 인연이었다.
우리는 앞에 앉은 승객이 한 번쯤 뒤돌아볼 정도로 큰 목소리로 반 아이들과 선생님에 대한 가십을 나누었다. 천 원짜리 조각 피자를 입에 물고 지하상가로 우르르 몰려갔다. 모든 바지를 만 원에 파는 똥 싼 바지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연청 돌청 스키니진을 하나 샀다. 지금에야 알리 테무가 있지만 그땐 모아 쇼핑이라고 중국제 옷을 저렴하게 파는 가게도 있었다. 오천 원짜리 옷을 사면 두 번도 입지 못하고 버려야 했지만 용돈으로 옷을 살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쇼핑을 마치면 무조건 노래방으로 향했다. 한 시간에 만 원이지만 암묵적으로 서비스 30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더걸스 소녀시대로 시작해 카라 포미닛 투애니원까지, 순전히 여자 아이돌 노래만 불러댔다. 우리와 동년배인데 벌써 치열한 연습생 과정을 거쳐 발탁되어 스타가 된 그들을 동경했다. 나는 카라의 막내 멤버 강지영을 부러워했다. 열다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가 너무 멋져서 남몰래 사모했던 것 같다.
노래방에서만큼은 아이돌이 된 듯 열창했는데 우리는 노래를 듣고 기획사 관계자가 명함을 주고 갈지도 모른다며 설레발쳤다. 당시 슈퍼스타 K처럼 일반인에서 스타가 되는 방송이 많아 허파에 헛바람이 잔뜩 들었다.
아는 걸그룹 노래를 전부 부른 다음엔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를 시작으로 아이비, zoo, 프리 스타일까지 발라드 세션이 시작되었다. 만 13세가 사랑을 해봤을 리 만무하다. 그저 노래 가사가 나오는 화면 뒤 뮤직비디오의 신파 드라마에 몰입한 채 이별 노래를 불러댔다.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도 주기적으로 노래방을 찾는다. 부르는 노래는 2009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시절 처음 시내 노래방으로 세계를 확장하며 체득했던 노랫말들은 생존 본능처럼 인이 박혀 있다. 뇌세포가 젊을 때 입력해 둔 노래여서 그런지, 안 들은지 몇 년 된 됐어도 툭 치면 랩 구절까지 와르르 튀어나온다.
요즘 노래는 너무 짧아서 못 부르겠다. 그 시절 음악은 최소 3분 30분이었는데 요즘엔 3분 넘는 노래도 찾기 어렵다. 코인 노래방에 가서 짧은 노래 부르는 건 사치다. 벌스 두 번과 브리지에 어거지로 붙인 랩까지 다 불러야 흥이 충족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만 원을 내고 29곡을 불렀다. 웬만한 글로벌 스타도 투어 콘서트에서 이렇게 많이 부르지 않는다.
2009년과 달라진 점은 성인곡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성인 비디오라는 단어가 성인이란 단어를 망쳤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얼마 전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불렀다. 우리 할머니의 벨소리였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있다네
어릴 땐 청승이라고 여겼는데, 이토록 철학적인 가사였다니. 미워하는 마음 단 한 톨도 없이 아낌 없이 사랑을 퍼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마 나의 노래방 레파토리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같은 노래가 계속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겠지.
늘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해야 하는 말을 하느라 지쳤던 성대가
노래방에서 간만에 제 역할에 충실했다.
(2025年 3月 2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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