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사용법
안녕 주야, 언니는 지금 공항이야. 갑자기 중국여행을 가게 됐어. 요즘 무비자 기간이기도 하고 비행기도 저렴해서 일주일 전에 급 결정했지 뭐야. 이제 두 시간만 있으면 비행기를 타. 너 공항 라운지 와본 적 있니? 언니는 연회비 만 원 내고 발급받은 신용카드 덕분에 라운지에서 우아한 음주를 즐기고 있어. 다음에 꼭 함께하자. 선뜻 언니가 집을 비운 동안 고양이 챙겨준다고 해서 고마워. 봉식이랑 까미도 새로운 누나가 와서 기쁘대.
우리 집 비밀번호는 성수살 때랑 똑같이 1733이야. 예전에 네가 비밀번호 못 외워서 내가 ‘17살이랑 33살이 연애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스토리텔링 해서 알려준 적 있지? 나는 정말 장난으로 말한 건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현실이었더라.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추악함이 너무 많다.
어쨌든, 집에 들어오면 옷이랑 가방은 무조건 옷방에 놔둬. 반드시. 밖에 십 초만 놔둬도 고양이 털이 잔뜩 묻을 거야. 얘네 얌전한 것처럼 보여도 털을 뿜어내거든. 옷방 안에 잠옷으로 입을만한 츄리닝 바지랑 반팔티 꺼내 놨어. 언니는 아직 수면 잠옷을 입지만, 너는 태양인 체질이니까 반팔로 준비했어. 이정도 서비스야 기본이지.
물은 브리타 정수기 따라 마시면 돼. 원래 자취 시작하고 나서부터 쭉 일 리터짜리 페트병 생수를 사다 먹었는데, 어느 날 문득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을 이렇게 생각 없이 써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찬장에 처박아 놨던 브리타 정수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 필터도 정품 필터 대신 활성탄만 교체하면 되는 호환 필터를 샀는데 쓰레기가 정말 획기적으로 줄었어. 아직 수돗물 맛이 약간 나긴 하는데 마실만 해.
커피 먹고 싶으면 모카포트로 끓여 먹어. 선반에 커피 캡슐 있는데 그걸 칼로 가르면 원두 가루가 나와. 그걸 모카포트에 넣고 끓여 먹으면 돼. 원래 캡슐 커피 머신이 있었는데 고장 나서 한동안은 그렇게 먹고 있어. 커피가 좀 쓰게 추출되긴 하는데, 물이랑 얼음이랑 타 먹으면 나쁘지 않아.
아, 냉장고에 있는 모든 건 네가 먹어도 돼. 근데 열어보고 실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 사실 별거 없거든. 오목한 그릇에 양배추 넣고 물 살짝 넣은 다음에 전자레인지에 데펴서 양배추 쌈 만들어 먹어도 되고, 달걀 구워 먹어도 되고. 아 치즈도 있어.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체다 치즈 36개입을 구매했단다. 본가 살 때 체다치즈 대용량 사는 게 로망이었는데 드디어 성취했어. 근데 함정은 김치가 없어. 지금 엄마랑 냉전 상태라 김치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 그래도 양배추에 쌈장 찍어 먹으면 김치랑 비슷하니까 그렇게라도 먹길. 냉동실에 스지탕이랑 토마토 스파게티 얼려 놨으니까 귀찮으면 꺼내 먹어. 밥은 일부러 안 해놨어. 쌀이랑 현미 있으니까 취향대로 해 먹으셔.
자, 이제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 우리 집 고양이 봉식이 까미 알지? 치즈가 봉식이고 삼색 카오스가 까미야. 봉식이는 성격이 엄청 무던하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주는 걸 좋아해. 반대로 까미는 겁도 많고 사람 손길도 싫어해. 자기가 좋을 때는 얼굴을 비비는데 만지려고 하면 림보하듯이 몸을 늘려서 피해. 둘이 나이는 비슷한데 성격이 진짜 달라. 저번에 인터넷 기사님 오셨을 때 까미는 현관문 열리자마자 소파 아래로 숨어버렸는데 봉식이는 기사님 얼굴까지 보고 느릿느릿 숨더라. 같은 배에서 태어났으면서 얼굴 빼고는 전부 반대인 너랑 나랑 닮은 것 같아.
왜 ‘고양이는 키우는 동물이 아니라 같이 사는 동물이다’란 말이 맞는 것 같아. 알아서 먹고 싸고 놀다가 때 되면 옆에 누워서 골골대는데, 내가 돌보는 존재라기 보다도 각자 도생하는 동반자 같은 느낌이 들어.
네가 할 건 그냥 밥 챙겨주고 똥 치워주는 거야. 일단 아침저녁으로 화장실을 치워줘. 고양이들이 오줌을 싸면 감자가 되고 똥을 싸면 미니 당근이 돼. 그걸 삽으로 퍼서 비닐에 넣어둬. 모아두면 언니가 가서 치울게. 생각보다 고양이 똥 냄새가 엄청 지독하다? 귀여운 얼굴로 어떻게 그런 악마 같은 똥을 싸는지 몰라. 근데 살다 보니까 그 냄새도 좋아지더라. 잘 먹고 배변 활동을 했다는 건 건강하다는 의미니까 말이야. 어떨 땐 부모 마음이 이런 건가 싶다니깐.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밥 챙겨 주면 돼. 이놈의 자식들이 예민해서 밥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먹질 않아. 그러니 사료가 남아있더라도 더 채워주는 게 포인트야.
마지막으로 파란색 장난감이 달린 낚싯대를 흔들면서 놀아주면 돼. 나는 고양이가 나른하고 게으른 동물인 줄 알았어. 근데 사냥놀이에 진짜 환장하더라. 특히 까미는 자다가도 방울 소리만 들리면 달려와.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진짜 한 시간을 놀아도 안 지쳐. 소심하고 겁 많은 녀석인데 어디서 이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마 까미는 길에서 살았더라도 쥐라도 잡아먹어 굶어 죽진 않았을 거야. 가끔 내 배까지도 뛴다니까? 근데 너무 높게 점프하면 허리에 안 좋을 수 있으니 살살만 놀아줘.
봉식이는 안아서 창문 밖을 보여주면 좋아해. 안아서 어깨 위에 올린 다음 밖을 구경 시켜주면 가만히 있어. 캣타워도 설치했는데 내 어깨에서 보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문자로 보내 줄게. 언니 원래 성수집에서는 인터넷도 안 됐던 거 알지? 봉천동 집에는 큰맘 먹고 인터넷도 설치했다. 무려 3년 약정이야. 집에서 인터넷 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 성수살 땐 맨날 핸드폰 핫스팟 틀어서 인터넷을 썼는데 2기가바이트 다 쓰면 노트북을 못했거든. 맨날 파일 다운받다가 데이터 다 쓰면 일 층 시장으로 내려가서 서울시 공용 와이파이로 마저 받고 했는데, 이제 다 추억이다.
요즘 햇살이 좋으니까 창문은 활짝 열어둬. 그러면 고양이가 햇빛이 고인 곳으로 가서 뒹굴뒹굴 데굴데굴할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충분하다는 기분이 들어. 걔네는 너무 태평해. 그 태평함에 나도 좀 감응된 것 같아. 너도 고양이 생활을 한 번 체험해 봐.
아차, 책상 위에 자살의 연구라는 책이 있을 텐데, 네가 제목만 보고 깜짝 놀랄까 봐 미리 말해. 가끔 부정적인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 충동적으로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에 미칠 때도 있긴 하지만, 머릿속 극단일 뿐 나쁜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아. 그저 알고 싶어서 산 책이야. 가까운 곳에서도 먼 곳에서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 전 세계 자살률 1위인 나라에 살면서 점점 무심해선 안 되는 소식에 무뎌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번 읽어 보려고 해.
로션이랑 샴푸는 있는 거 막 써도 되고, 칫솔은 저번에 네가 썼던 것 걸어 놨으니까 그거 쓰면 돼. 그럼 고양이랑 잘 지내고 있어. 언니가 보답으로 헤라 파운데이션 23호 사다 줄게.
그럼 삼 일 뒤에 보자, 안녕.
(2025年 3月 2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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