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는 삶의 형태
퇴근 후 루틴처럼 행하는 은밀한 취미가 하나 있다. 바로 외국 항공사 승무원들의 일상 브이로그를 보는 일이다. 비교적 가까운 싱가폴이나 홍콩, 말레이시아부터 미국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 심지어 걸프까지 전 세계 등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본다.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은밀한 꿈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어쩌다 외국 나갈 일이 생기면 위스키 5 샷을 때려 마실 정도로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자,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질 정도로 용감하지 못하며 단정한 용모 치장이 불가능한 사람으로서 시켜 준다 해도 할 수 없는 직업이다.
외항사 승무원들은 외국에 척척 터를 잡는다. 먼 타지에서 자동차를 구매해서 공항까지 통근하며, 집도 빌리고 영어로 된 계약서에도 사인한다. 나는 평생을 산 한국에서도 두려워서 망설이는 일을 타지에서도 척척 해낸다. 그들은 한 달에도 몇 번씩 대륙을 오간다. 샤워하는 물의 수질부터 딸기 맛까지 이국적인 삶을 산다. 내가 사는 일상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삶의 형태다. 아마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할 거란 걸 알기에 더욱 열심히 간접 체험해 보려는 것 같다.
2020년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오십만 원 주고 끊었던 적 있다. 십칠만 원 주고 비자 발급에 필요한 건강 검진도 받았다. 호주 브리즈번으로 가는 편도 이십만 원짜리 비행기 티켓만 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두려웠는지 비행기표 하나 끊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누군가 ‘호주 워홀에 왜 못 갔냐’ 물으면 코로나 때문이라고 대답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사실 코로나는 좋은 핑계였다. 자의로 안 가려 했던 워홀을 타의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두려웠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땅에서 떨어져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노력했지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인간은 본래 겪어본 경험의 경계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20년 가까이 같은 집에 살며 극소수의 인간관계만 유지한 채 한정된 삶의 경계 안에서 살아온 내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딛는 단 한 번의 발자국이 너무 어려웠다. 비싸게 끊은 워홀 비자를 찢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 해외에 살아볼 짬밥은 안되는구나.
동경하는 삶의 형태는 나이를 먹을 때마다 달라졌다. 10대 때는 또래 아이돌을 동경했다. 교복 위에 바람막이도 맘대로 못 입는 엄격한 학교에서 국영수나 쎄 빠지게 공부하는 중학생이 보기엔, 어린 나이에 출중한 외모와 실력을 인정 받아 사랑 받고 큰 돈을 버는 아이돌이 부러웠다. 20대 초반엔 연애 예능에 나온 금수저 출연진을 동경했다. 인생에서 가장 예쁘다는 스무살을 맞았는데 나를 기다린 것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성인 여드름이었으며, 돈 없는 학생들의 데이트는 거지 같았다. 예능 속 출연진은 나와 동년배인데도 성숙한 외모를 가졌으며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 보였다. 20대 후반인 지금 승무원을 동경하는 까닭은 아마 비교할 것 투성이인 서울에 대한 지겨움과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내 인생에서 불만족스러운 면을 충만하게 가진 이를 부러워하게 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인생이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떠올리는 팝송이 있다. 싱스트리트라는 영화의 OST였던 Drive It Like You Stole It다. 의역을 잔뜩 가미한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인생을 내 차(My car)라고 생각한다면 기스나면 어쩌지, 고장 나면 어쩌지 싶어 아끼고 애지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을 훔친 차(Stolen car)라고 생각한다면? 덤으로 얻은 차니까, 게다가 내 차도 아니니까 고장이나 기스 날 걱정 없이 막 굴리며 버라이어티하게 운전하게 된다.
혹자는 인생은 소중하니까 원하는 걸 다해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나는 저 팝송처럼 오히려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다.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망가질 걱정 없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될 테니 말이다.
(2025年 4月 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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