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로니
인간의 회복력은 실로 놀랍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을 물어뜯는 나는 매일같이 이를 체감한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 옆에 살을 물어뜯는 편인데,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습관이라 이제 웬만한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지경이다.
새빨갛던 상처는 다음 날이 되면 핑크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연핑크, 그 다음날엔 살색이 된다. 몇 밤 자고 일어나면 언제 다쳤냐는 듯 회복되어 있다. 아무리 깊은 상처였을지라도 부지런히 얇은 새살을 내놓는다.
동생과 함께 동남아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미얀마였는데, 당시 서울로 치면 부산 정도 되는 중부 도시 ‘만달레이’를 여행하며 오토바이 택시에 탑승했다. 오토바이 택시를 탔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여행하는 도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 기분을 사랑한다.
그런데 내리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뎌 배기통에 종아리 살이 데고 말았다. 처음엔 뱀의 허물처럼 얇은 껍질만 벗겨지길래 괜찮을 줄 알고 택시 기사를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환부 안에 뽀얀 생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껍질의 보호 없이 공기를 만난 생살은 마치 갓 태어난 캥거루처럼 빨개지기 시작했다. 부분 부분 하얗고 빨개져 인체 모형 색깔 같기도 했다. 상처는 점점 더 붉어지더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페퍼로니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다음날 바로 미얀마 사람들로 꽉 찬 현지 병원으로 향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는 미얀마 의료진에게 손짓발짓으로 화상 당했음을 설명한 뒤 연고와 붕대를 처방받았다.
다리에 컴퓨터 마우스만한 작은 땜빵이 하나 났을 뿐인데 걸을 때도 절뚝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행을 끝낼 순 없었다.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내리며 번 돈으로 충당한 비행깃값을 생각하며 꼼꼼하게 붕대를 붙였고 최대한 다친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며 걸었다.
하지만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날이 덥고 날벌레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덧날 것에 대한 걱정이 계속 커졌다.
언니가 막연한 불안함과 통증에 툴툴대며 볼멘소리를 하자, 동생은 오히려 언니를 나무라며 말했다.
“언니, 생각을 해봐. 상처가 안 아프고 나을 수 있겠어? 아픈 건 다 나으려고 아픈 거지.”
동생의 당연한 말에 나는 묘하게 설득되었다. 아픔은 낫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 아픔이 없다면 나을 수 없는 것.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오른 다리의 고통을 ‘낫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견딜만한 것이 되었다.
결국 페퍼로니 다리를 질질 끌며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건물이라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투어까지도 잘 마칠 수 있었다. 더운 나라들을 떠돌며 강행군으로 여행을 지속하는 동안 페퍼로니는 점점 갈릭난(Garlic Naan) 같은 상태로 변태하였다. 마지막 여행지인 태국에 도착했을 때는 밀크 반점 수준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부로 흉터 치료를 받지 않았다. 아직도 연하게 남아 있는 흉터를 보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언니에게 충고하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린다. 마치 아픔을 견디면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증거를 지니고 사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는 새, 상처는 조금씩 낫는다. 언젠가 이 아픔도 기억나지 않을 순간이 올 것이다.
(2025年 5月 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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