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오토보이
오래될수록 경제적 가치를 더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와인 LP 코믹북 미술 작품, 그리고 필름 카메라.
필름 카메라를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가족에게 안 쓰는 카메라가 있다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으로 할아버지와 엄마로부터 각각 카메라를 얻어 냈다.
“할아버지 옛날에 쓰던 필름 카메라 안 쓰시면 저 주세요"
할머니에게는 엄마 대하듯 애살있게 굴지만 할아버지는 왠지 어렵다. 할머니에게는 반말을 쓰지만 할아버지에겐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온다.
갑작스런 손주의 요청에 할아버지는 흔쾌히 닫혀 있던 자개장을 열어 카메라를 꺼냈다. 그러고는 금색 반지를 낀 손으로 카메라를 건네며 말했다. 얼마 전 카메라 가게에 가서 필름도 새로 끼우고 배터리도 갈아 놓았노라고.
카메라는 1980년대 금성 캐논에서 출시되었던 오토보이였다. 아마 노랗게 빛바랜 앨범 속 단발머리 엄마와 잠자리 안경을 쓴 삼촌 사진은 이 카메라로 촬영된 것일 테다. 오토보이는 2007년 쯤 굴러들어 온 삼성 디카에게 자리를 비켜준 뒤 계속 서랍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금성 캐논도 삼성 카메라도 없는데 말이다.
카메라는 관리를 어찌나 잘했는지 구식 디자인 말고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태양인 체질에다가 대장 성격인 할머니와는 정반대로 할아버지는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그 성격이 오래된 카메라에서 대번에 드러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한 할아버지는 언젠가 쓰일 것을 대비해 배터리와 필름까지 싹 갈아 놓은 것이다. 나와도 참 반대되는 성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카메라를 아끼고 아끼다가 작년 겨울 여수 여행 때 처음 들었다. 할아버지의 카메라가 너무 소중한 나머지 정말 간직하고 싶은 순간에만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딱 세 번째로 셔터를 눌렀을 때 필름이 자동으로 감기기 시작했다. 분명 할아버지가 필름을 갈아 끼워놓았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외관에 스크래치 하나 없는 카메라가 고장 났을 리 만무하니, 아마 할아버지가 이미 여러 장 찍어 놓고 기억을 못 한 것일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옛 사진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설렘을 안고 종로 우성상사에 현상을 맡겼다. 계좌로 오천 원을 이체했다.
버스에서 졸면서 집에 돌아가는데 메일 알람이 울렸다. 우성상사의 한메일 주소로 온 메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첨부파일의 압축을 열었다.
어라라. 내용물은 12장이 전부였다. 게다가 뿌예서 사진 속 어떤 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현상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사장님께 문자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필름은 20년도 더 된 것이었고 애초에 12장 짜리 필름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12장짜리 필름이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12장짜리 필름은 2006년 단종되었다. 할아버지는 분명 얼마 전에 필름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는데 말이다.
멍하니 뿌연 사진을 보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20년 전을 얼마 전이라고 표현하신 것에 수긍했다. 나도 노래방이나 쏘다니던 학창 시절을 얼마 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십년도 더 된 일이니까. 아마 십년 뒤에도 얼마 전이라고 느낄 게 분명하니까.
지금 나는 12장짜리 필름도 삼성 카메라도 나오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보다 나이든 필름 카메라로 오늘을 찍는다. 흐르는 시간 속 멈췄으면 하는 순간을 담는다.
(2025年 6月 15日)
ps.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무려 4주만입니다!
저는 엄마와의 유럽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한국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정말 돌아오기 싫었답니다)
워낙 멀고 비싼 유럽이다 보니 ‘살면서 언젠가는 가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늘 생각하며 살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번갯불 콩 볶아 먹듯 다녀왔네요. 어쩌다 보니 신혼부부들에게 유행하는 코스(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로 다녀오기도 했고 모녀 여행이다 보니 ‘엄마와 신혼여행(가제)’이라는 여행 에세이 연재도 준비 중입니다! 독자분들께 공표했으니 올해 안에 꼭 지키는 걸로 하겠습니다.
연재를 쉬면서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면 좋을까, 이솔올림을 유지하는 게 맞을까 ...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왔는데요, 결국 뭐가 될지 몰라도 계속 연재해 보자!는 결론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소소하지만 조금은 공감되고 조금은 피식하게 되는 일상 에세이 계속 전달 드려 보겠습니다.
다음주엔 전국에 비가 많이 온다던데 조심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이솔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