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짬뽕이다. 이번 주 내내 체하는 바람에 차갑게 식은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내려줄 국물이 필요했다. 카를로와 함께 집 근처 중국집을 찾았다. 홀에서 먹으면 자장면 오 천 원, 짬뽕 육 천 원, 탕수육 만 천 원에 팔길래 눈여겨본 식당이었다. 정확히 여섯 시에 도착해서 그런지 배달 주문 전화와 홀 손님으로 나까지 정신없었다.
우리는 짜장 짬뽕 탕수육을 주문했다. 짬뽕을 짬뽕밥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외국인 종업원분과 소통 실패로 그냥 공기밥을 추가했다. 단 오 분 만에 세 가지 메뉴가 식탁 위에 차려졌다. 중국집 음식이 얼마나 빨리 나오는지 오랜만에 체감했다. 요즘 웬만한 패스트푸드점보다 빨리 나오는 것 같다.
어릴 땐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참 자주 먹었는데. 그 시절엔 매달 집 앞에 배달 책자가 왔다. 두꺼운 책자 안에는 족발 피자 치킨 분식 야식 온갖 구미 당기는 메뉴들이 반들거리는 종이 위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심심한 주말에 하릴없이 누워 전단지 속 음식을 구경하는 게 그 시절의 낙이었다. 배달 음식은 그때도 비싼 것이어서 늘 구경만 했다. 배달 음식값이 이렇게 오를 줄 알았다면 그때 엄마를 졸라 많이 먹어둘 걸 그랬다.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에는 집전화로 식당 번호를 눌러 집 주소와 메뉴를 사장님에게 말하면, 알아서 배달까지 마쳐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까 사장님의 오토바이가 닿을 수 있는 동네까지가 영업 대상이던 시절. 지금 생각해 보면 90년대 생인 나도 참 아날로그한 시대를 살았다.
짬뽕 국물은 얼큰했지만 홍합과 오징어가 두 개씩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커피 한 잔이 육 천 원인 세상이 되었으니, 육 천 원짜리 짬뽐에 이 정도는 용서할 수 있다. 속이 안 좋았던 터라 면을 덜어 카를로에게 나누고 나는 밥을 말아 먹었다. 따뜻하고 매운 것이 들어가니 속이 풀렸다.
짬뽕 국물이 잔뜩 밴 양파를 씹어 먹는데, 옆 테이블이 시끄러웠다. 중년 커플 중 한 명이 종업원에게 컴플레인을 걸고 있었다. 왜 다른 테이블처럼 탕수육 소스에 채소가 안 들어 있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 테이블 탕수육을 가리키며 소란을 떨었다. 당근 양배추 양파가 소스에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컴플레인러는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야채를 빼먹어"라며 툴툴댔다. 그냥 채소 넣어달라고 하면 될 일 아닌가 싶었다. 외국인 종업원은 금방 채소를 추가해 갖다주었다. 컴플레인러는 우리 테이블을 가리키며 또 트집을 걸었다. “저희도 저기처럼 야채 볶아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소스에는 볶은 야채가 들어간 줄 알았나 보다.
너무 잘 들리길래 내가 답변했다.
“저희꺼도 생야채에요”
그의 볼멘 소리는 가스불처럼 금방 사그라들었다. 할 말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컴플레인을 알아듣지 못하던 외국인을 도왔다는 마음에 뿌듯했다. 잠시 강강약약이 된 것 같아 설렜다.세상 모든 불의에 맞설 수 있겠다는 용기. 이런 용기를 너무 쉽게 가지고 또 쉽게 잃는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중국집을 나와 힘차게 집으로 걸었다. 그의 무례함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실수 같으면 그냥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왜 너무나도 급하게 속단하고 본인이 생각한 정답과 틀렸다고 무슨 용의로 미쳤냐는 말을 뱉는 걸까. 자신은 언제나 모든 일에 무결한 사람일까.
얼마 전 진주 할머니가 집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린이 보호 구역인데 빨간 마티즈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를 보지 않고 그대로 쳤다. 작고 가벼운 나의 환순 씨는 얼마간 붕 날았다가 차가운 도로로 떨어졌다. 아주 다행히 가슴뼈에 골절 정도로만 다쳤다고 한다. 이십 년도 넘게 산, 이젠 눈 감고도 다닐 만큼 눈에 훤한 동네에서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환순 씨의 대처였다. 그는 놀라서 뛰쳐나온 차주에게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단다. 서울에서 운전하고 사는 자신의 딸 아들도 할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해서 그러셨단다. 매일 수십 번씩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왼다는 우리 할머니는 본인의 무결하지 않음을, 그리고 나의 자식들 또한 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거다. 어제 남의 실수가 나의 실수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도 그거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고, 내가 베푼 관용은 언젠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남에게 친절한 것은 결국 자신에게 친절한 것이다.
아직 나밖에 담기지 않는 야트막한 마음을 가진 나는 매일 세 번씩 관세음보살을 외워야겠다. 소스에 야채가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은 열 번씩 외웠으면 좋겠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